최근에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책에서 나온 ‘느낌을 위한 공간 만들기’라는 개념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감정을 수용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나는 이 과정이 얼마나 나와 어울리지 않는지 느꼈다. 책에서는 “느낌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내 감정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학대하며 살고 있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문제를 객관화하면서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이 오랜 습관이 된 이유는 아마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생존 전략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해결책을 찾는 데만 온 에너지를 쏟는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다음엔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반복한다. 해결책을 찾다 보면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어떻게든 나한테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책하고, 해결해도 본전이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에서 도망치지 않고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과정이 결국 내 감정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회피였다.
‘괜찮아’라는 말은 내가 많이 쓰는 말 중 하나다. 하루는 엄마가 “사과 줄까?”라고 물어서 “괜찮아요”라고 답했는데, ‘안 먹을래요’, ‘먹을래요, 주세요’가 아니라 ‘괜찮다’는 건 또 뭐냐고 물었다. 그러게요. 친구가 “도움 필요해?”라고 물어도 “괜찮아”라고 한다. 난 이러나 저러나 괜찮으니까, 참을 수 있으니까. 나 때문에 번거롭게 하는 게 싫으니까. 좋지요!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지 못한다.
자주 “내가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나의 감정을 억누르고 “괜찮아”를 습관처럼 내뱉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괜찮아’를 통해 내 감정을 숨기고, 내 불편함을 스스로 없던 일로 만들어왔다. 이 말 뒤에는 “힘들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상대방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내 욕구와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방식의 연장선이다.
문제가 생기면 나는 감정에 압도되지 않으려고 객관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 일이 왜 일어났을까?”,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감정을 분석하고 정리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감정을 느낄 틈은 없었다. 감정을 피하려고 문제의 해결책만 찾다 보니 내게 남은 것은 ‘끊임없는 생각’뿐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 방식이 나를 더 고립시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내 감정을 인정하는 대신, “이건 단순한 문제야. 해결하면 돼”라며 덮어버렸다. 결국 감정을 객관화한다는 건 감정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최근 상담에서 내가 오랫동안 스스로를 학대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다독인다고 생각했던 다짐들은 나를 몰아세우는 고함에 불과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하면 돼”, “다 감당할 수 있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충분한 여유를 주지 않아서 병이 났다.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자. 감정을 받아들이자.
고체 치약 150정이 남았다. 다 쓰면 괜찮아지겠지. 그날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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