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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겨울엔 다들 좀더 아파지니깐

구세주 컴플렉스

나는 구세주 컴플렉스가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문제를 해결하고 누군가를 돕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떠맡았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철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런 아버지의 행동은 우리 가족을 끊임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엄마는 자연스레 나에게 의지했다. 엄마에게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를 때, 엄마는 “얼른 잘못했다고 해.”라고 얘기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부리다가 맞은 적도 숱하게 많다. 조금씩 성장하면서 울음을 참고 두려움을 숨겼다. 아버지의 화를 가라앉히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애써 노력했다. 아버지와 엄마를 오가며 중재자 노릇을 했다. 친척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취해 주사를 부리는 아버지를 달래 집으로 데려갔다. 아버지 기분을 맞춰가며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요령 없는 엄마를 다독이며 “이제 엄마도 그만하자.”라고 말했다. 나는 아들이 아니라 엄마의 파트너였다.

엄마는 종종 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너네 아빤 너무 단순하잖아. 어쩜 저렇게 단순할까, 자기밖에 몰라.” 나는 사춘기가 올 틈이 없었다. 엄마의 걱정을 덜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상위권의 성적을 늘 유지했다. 엄마가 “나 너 때문에 산다.”라는 말을 하면 그 말이 위로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남겼다. 내가 없으면 엄마는 무너질 거라는 생각에 나는 더 열심히 ‘구세주’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 내가 자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누군가 힘들어하면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해결책을 찾으려 애썼다. 친구들이 다투면 나는 화해를 주선하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 우울해하면 그들의 곁에 앉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나의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내 곁에서 위로를 받던 사람은 괜찮아지면 나를 떠났다. 애인이든 친구든 모두 그랬다. 나는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먼저 위로했다. “네 마음이 우선이야. 너를 먼저 생각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결국 버텨낼 거야.”

아버지가 폭력적이고 철없던 이유를 어른이 된 후에야 조금씩 이해하려 애썼다. 그 역시 불완전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상처를 다스릴 방법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우리 가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나에게 구세주 컴플렉스를 남겨,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엄마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를 이용했다. 내가 말을 잘 들어주니까, 사고를 치지 않으니까, 얘기가 잘 통하니까, 더 닮았으니까. 나를 위로의 수단으로 삼았다. 아마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엄마도 살아야 했겠지.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올해 아버지 칠순 기념으로 동남아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여행을 한 달 앞두고 아버지가 사실 6년 동안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 엄마의 구세주로 나섰다. 작은 집의 명의를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로 넘기게 아버지를 설득하고 그 과정을 도왔다. 엄마의 의중을 물어 변호사를 구해 상간자 소송을 진행했다. 변호사에겐 엄마 대신 나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엄마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당사자라 힘들 테니까, 내가 엄마를 도와줘야 하니까. 나는 착한 아들이니까.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절연을 선언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회피하는 사람이니까. 절연은 내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겐 사과하지 않고, 내용증명을 받은 상간자와 상간자의 딸에게는 사과를 하는 걸 보곤 조금 마음이 아프긴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아버지는 “불쌍한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라고 했다. 글쎄, 누가 제일 불쌍한가요.

애인이 바람을 피우고 나를 떠났다. 새로 알게 된 사람과 잘해보고 싶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울고 절규하고 토하고, 내 뺨을 때리고 방 벽에 머리를 찧었다. 이제는 편해지고 싶다. 다 지겹다. 모두 나를 떠난다. 그들은 내가 괜찮을 거라고 착각하며 작별을 고한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다.

이 와중에도 나는 전 애인에게 최선을 다해 말했다. 화를 내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슬픈지, 이게 왜 무례한 일인지 설명하고, 다 용서할 테니 다시 만나자고. 내가 더 사랑해도 된다고. 그런 사랑도 있다고. 전 애인은 울었지만, 그 눈물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물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나랑 제일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있냐고, 그래줄 수 있냐고.” 약속이 지켜지길 바라지만 그게 쉬울까.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 난 무례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는데 응원을 해주고 싶다. 난 내가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쥐어짜듯 말했다. 난 나를 위로하는 방법 말고는 모든 걸 했다. 내가 슬퍼하는 모습에 애인이 아파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버틸만 해서 이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난 버티기 힘든 상태에 있다.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싶지만, 내가 한 행동들을 너무 답답해하고 화를 낼 것 같아서 쉽게 말하지 못했다. 다니던 정신과에는 자해를 한다는 얘기는 쏙 빼고 사실 전달만 했다. “별 일이 다 있네요.”라고 말했다. 약은 늘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전화에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 다니던 상담소에 연락해 긴급으로 예약을 잡았다. 미국 연수 중이라는 선생님은 새벽 네 시에 시간을 내주었다.

상담사는 삶과 죽음을 연결해 생각해보자고 했다. “날 위해 사는 걸 연습해보고, 죽는 걸 선택하더라도 그 이후에 자의로 하자.” 나는 더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나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 슬픔은 시간차를 두고 찾아온다. 일단 일을 해결하고, 남을 챙기고, 나를 해친 자를 걱정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덜 다쳤을까를 생각한다. 모든 일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지낸다. “내가 이래서 그랬나? 저랬으면 달랐을까? 내가 태어난 게 문제인가? 계속 살아있는 게 문제인가?” 이런 상태다.

나아지겠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친구들에게 부탁해두었다. “이따금 연락 좀 해달라.” 내 강박을 이용해 사는 시간을 더 늘리려고 꾀를 내었다. 답장은 꼭 할 테니 연락 좀 해줘. 내가 좋아지면 갚을게. 갚을게. 갚으면서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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