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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겨울엔 다들 좀더 아파지니깐

운신의 폭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내 행동과 감정의 폭은 점점 좁아진다.

내가 배운 해리 현상의 대표적인 예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사람을 증오하는 나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해리된 상태로 그 사람에게 폭력을 행한다는 사례였다. 내가 그만큼 화가 나 있었던 걸까? 하지만 지금 내 상황과 딱 맞는 예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다시 잘되고 싶은 미련보다는 배신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건데, 객관적으로 이게 이렇게까지 힘들 만한 일인가 싶어서 스스로도 의아하다.

오늘 정신과에서는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이 커서 알코올중독자를 만나는 사례를 얘기했다. 흔한 사례다. 연애할 땐 알코올중독자가 아니었어도 중독에 약한 상대는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만다. 딸은 이게 내 운명이겠거니 생각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딸은 남편의 사랑을 갈구한다. 딸은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 관계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더 잘하면, 내가 사랑으로 감싸 안으면,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알코올중독자인 남편도 괜찮아지고 술보다 나를 사랑할 거라 믿는다. 

나한테 딱 맞는 사례는 아니지만.

사랑에 약한 사람을 만난 것일 수도 있지. 위로에 약한 사람을. 안아주는 것에 약한 사람을. 돌봐주는 사람을. 돌봐야 하는 사람을. 아픈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을 내가 만난 것일 수도 있다. 

가정폭력 가정에서 자란 자식이 피해자인 엄마를 원망하는 사례도 많다. “엄마가 그때 아빠한테 맞섰다면 어땠을까?” “가만히 참고 버티기만 했던 엄마를 증오한다.” 자식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싸우고 이기고 독립하는 법을 배웠어야 하는데, 엄마 때문에 그걸 배우지 못했다고 느낀다. 

정신과에 가해자가 찾아가는 법은 없다. 피해자만 찾아간다. 가해자는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내가 이랬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잘 산다. 잘 살아간다. 나도 엄마는 답답하고 아버지는 부럽다고 생각을 자주 했으니까. 저렇게 살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많다. 부서진 집기를 치우면서 생각한다. 화를 버럭 내고 집 밖을 나선 사람은 집에서 뒷수습을 하는 사람까지 생각하진 어렵다. 하룻밤 다른 곳에서 지내다 와서, 깨끗이 치워놓은 방에서 "내가 미안하오, 다신 안 그러겠소." 약속을 하면 된다. 뒤끝이 없다. 좋겠다. 개새끼.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쓴 각서가 몇 장이더라. 엄만 또 그걸 왜 모으고 있었나.

증오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동인이 될 수 있지만, 수치심과 좌절감은 사람을 속박한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나의 운신의 폭도 좁아진다. 나는 지금 내가 뭐에 괴로운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끊임없이 생각한다. “내가 이랬으면 어땠을까?” “내가 조금 더 잘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엄마도 그랬겠지. “내가 다정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다정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으니까.” 나는 "정말 따뜻하고 착한 사람인데." 엄마는 “내가 좀 더 집에서 웃어줬어야 했나?” 나는 "내가 너무 다그치고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나?" 엄마랑 나랑 뭐가 달라. 스스로를 탓하고 있다.

나는 엄마가 나에게 모멸감을 준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거짓말을 하고, 상간자를 두둔하고, 되레 화를 낼 때조차 엄마는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와 계속 살았고, 그의 밥을 차렸고, 주말이면 할아버지를 찾아뵈러 같이 갔다. 제사상을 차렸고, 추석에도 나에게 집에 오라고 말했다.

나는

애인을 바로 용서하는 걸 택했고, 구토를 하면서도 내가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잘 만나자고 설득했다. 애인의 새 사람에게 전화해 선을 지켜달라고 말했다. 둘이 겹치는 시간 없이 쉬프트를 바꿔준다는 카페 사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어휴 죽어라 죽어.

9년 전, 당뇨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댕뇨일기를 적었다. 우울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마다 그냥 “힝구”라고 말해야지. 힝구. 오늘도 힝구. 내일도 힝구. 당분간은 힝구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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